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
"그녀가 준 립스틱이 썩 잘 어울리는 아이의 얼굴은 이제 아이가 아닌 여자의 얼굴이었다. 그 익숙한 낯선 얼굴에서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의 윤곽을 그대로 발견하고 놀라움과 대견함과 사랑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기억은 떠올리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희미해져서, 마치 석양 무렵의 햇살처럼, 그렇게 약간의 온기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눈을 뜬 순간부터 그녀를 지배한, 주위를 둘러싼 것과 똑같은 어둠뿐이었다."
"그녀의 몸은 거기에 박자를 맞춰 서서히 열렸다. 진통의 파도가 밀려왔다 사라지면서 심장이 머릿속에서 뛰는 듯한 격심한 두통이 덮쳐왔다."
"내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이러한 강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키워줬으니 감사하라는 말 앞에는,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는 진심일 것이다. 내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 한국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세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생존이기 때문이다."
"좋은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으나 나쁜 시간을 소원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래는 없었다. 그와 내가 알았던 모든 삶의 유형들은 전부 과거에 갇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삶이란 거대한 충격과 명료한 생존본능이 동시에 찬란하게 떠오른 과거의 어느 시간에 갇힌 채, 유일하게 의미 있었던 그 순간에 했듯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되풀이해 확인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 순간은 짧지만, 순간이 지나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생존을 그저 무의미하게 반복해서 확인하는 동안 좋은 시간도 나쁜 시간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감상
노벨문학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리는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오른 책이기도 하다. 10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책으로 각각 개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책의 제목인 저주토끼는 첫 시작을 장식하고 있다. 저주토끼를 비롯한 다양한 내용의 단편 소설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읽으면서 기괴하고 음산한 느낌을 많이 가져야 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비롯해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살펴보면, 부커상은 인간의 숨기고픈 은밀한 영역을 다룬 소설을 선호하는 것 같다. 중간에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단편 소설도 있었다. 그래서 내 머리가 나빠진 건가? 하며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후 이 책에 관한 여러 사람의 글들을 읽어 보니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기이하고 쓸쓸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평소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감정의 음지를 건드린 소설들이었다. 이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는 것이란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정말 재밌게 읽었었다. 「저주토끼」를 통해 누군가를 복수하게 되지만 결국 그러한 복수는 자신에게도 해가 간다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었다. 변기에서 시작된 「머리」와의 만남은 읽으면 읽을수록 기이하게 느껴졌지만, 마지막 결말에서는 소름이 끼칠 만큼 충격적이기도 했었다.
그리고 가장 이해가 안 되었던 「차가운 손가락」, 다행히 다른 사람들도 이해하지 못한 소설이었다. 차가운 손가락은 과연 누구였을까? 어둠 속에서 이끌어준 그 목소리는 과연 누구였을지 어느 사람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몸하다」는 월경한다는 의미로 피임약 남용으로 임신이 된 것에 대한 내용이다. 무정란으로 임신이 되어 하루빨리 아이의 아빠가 되어줄 남자를 찾아야 했다. 인간이 무정란으로 임신한 것 자체가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안녕, 내 사랑」은 반려로봇에 관한 내용으로 마지막에는 그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덫」은 황금이 되는 피를 흘리는 여우에 관한 내용이다. 「흉터」는 까마귀와 비슷한 요괴의 제물이 되어 동굴 속에 갇혀 사는 소년에 관한 내용이다. 「즐거운 나의 집」은 한 부부가 사연 있는 건물을 사게 된다. 하지만 건물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아이인 줄 알았던 것이 사실은 건물 속에 있었던 그림자였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이 가장 놀라웠다.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신의 영역을 넘본 인간의 탐욕을 다룬 내용이다. 초원 공주의 활약이 돋보였다. 마지막으로 「재회」는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이었다. 죽은 영혼이 보이는 한 남자와 여자에 관한 내용이다.
읽으면서 다소 기괴한 내용들을 써 내려간 작가의 의도가 궁금했다. 책에 실린 단편소설의 끝이 다 좋지만은 않았다. 완전한 해피엔딩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찝찝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을 통해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소설의 내용보다 작가의 말이 깊이 와닿았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때에 따라 필요하지만 그러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러한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말. 쓸쓸한 이야기들로 낯설고 사나운 세상에서 혼자서 분투하는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려는 작가의 의도를 통해 여러 의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 이러한 소설을 읽으면서 찝찝해하며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던 이유는 소설의 소재나 내용이 낯설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기 싫은, 직면하기 싫은 세상의 단면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면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던 어두운 것을 끄집어 내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익숙했던 어둠을 제대로 마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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